한국 최초로 4성 장군 백선엽 장군의 생애와 업적
10년간 외교관 생활을 마친 백선엽 대사는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969년에 귀국한다. 10년 전 백선엽 장군이 한국을 떠날 때와는 달리, 산업화 초기 대한민국은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온 인구가 1,000만명을 육박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인구로 서울 교통은 혼잡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유일한 교통 수단은 매연을 뿜어내는 '드럼통 버스(미군이 버리고 간 드럼통을 두들겨 만든 버스)'와 '기차' 뿐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선진국 도시의 지하철 도입이 시급했다. 그러나 당시의 나라 형편으로는 천문학적 예산을 조달할 수 없었다. 차선책으로 철도 출발역을 분산시켰다. 철도 승객의 서울역 집중을 분산 시키되 경부선만은 서울역 발착을 그대로 두고, 호남선과 장항선은 용산역, 중앙선과 경춘선은 청량리역으로 옮겼다.
이런 대책만으로는 혼잡한 교통 해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백선엽 장관은 한국에 지하철이 꼭 필요하다고 믿고 지하철 건설에 집중하였다. 사방으로 기술지원과 차관을 얻기 위해 미국, 유럽 및 일본을 수차례 방문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액수의 차관을 얻는다는 것은 그 당시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프랑스 대사로 있었던 백 장관은 파리의 메트로를 선호했으나, 일본 지하철이 기술면이나 비용면, 모든 여건상 한국을 위해 유리하다는 결론이 내려질 무렵이었다. 이런 여러가지 고난을 겪고 있던 중 뜻밖의 요도호 사건이 일어났다.
백선엽 교통부장관이 김포공항을 담당하고 있을 때 요도호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에서 적군파 요원 9명이 일본 국내 항공기를 납치하여 평양으로 가기를 강요했다. 비행기가 납치되어 평양으로 가던 중, 일본항공 조종사는 김포공항에 납치 상황을 설명하며 김포공항에 착륙을 요청하였다. 공항에 착륙 후 납치범과 일본정부 간에 오랜 협상 끝에 일본 운수성 정무차관이 승객 대신 인질이 되어 북한으로 향했다. 그 후 인질로 잡혀 갔던 일본 정무차관도 돌아오고 다행히도 이 사건은 희생자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무사히 돌아온 정무차관은 백 장관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무엇이든 바라는 요청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지하철 건설에 고심하던 백선엽 장관은 일본에 지하철 기술지원과 건설자금을 부탁했다. 일본 정무차관은 약속을 지켜 주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을 설계, 1971년 4월에 기공식을 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50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지하철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1970년대는 대한민국이 중화학 공업에 국운을 걸었던 시대였다. 백선엽 장군은 1971년 6월, 충주비료 사장으로 임명되어 당시 문제가 많던 나주의 호남비료를 통합하여 농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비료의 생산과 공급에 차질이 없게 하는 데에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전국에 산재한 소규모 비료회사들을 통합하여 궁극적으로는 국영기업으로 만드는 과업을 백선엽 장군에게 맡겼다.
백선엽 장군은 약 2년간 고군분투하면서 양 개 비료회사의 복잡한 마찰들이나 돌발적인 공장의 대형 사고들을 마치 전쟁 치르듯이 몸소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며 성공적으로 관리해 나아갔고 그 결과, 비료생산이 점차 증가하게 되면서 전국 농촌의 농업생산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점차 백선엽의 화학공업은 이제 비료만이 아니라 석유화학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어 갔다. 박정희 대통령의 용인술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1973년 2월, 정부는 전국 각지의 화학공업 관련 회사를 다시 통합하기 위한 '한국종합화학주식회사법'을 공포하고, 그 해 9월 백선엽 장군을 한국종합화학 초대 사장으로 임명하여 충주.호남비료회사도 한국종합화학으로 승계되었다. 무엇보다 제7비료공장으로 남해화학과 전남 여수에 대규모 석유화학공업단지를 짓는 중차대한 임무가 주어졌다.
특히, 여수의 대규모 석유화학공장 단지 건설은 연간 35만t의 에틸렌 생산을 목표로 추진한 것으로, 마침 그해 10월에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오일쇼크로 원유 수출 불안정, 가격 폭등은 장기 불황을 예고하는 상황이어서 정부로서는 큰 도박에 승부를 건 셈이 되었다. 그러한 악조건 하에서 가장 큰 난제는 건설 자금 마련이었다, 일본 정부의 통산성을 설득하여 차관을 얻어내는 방법 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결국, 백선엽은 호남석유화학(장지수 해군 예.대장)과 호남에틸렌(김필상 육군 예.소장)을 맡았던 두 장성과 함께 일본으로 날아가 한달 간의 끈질긴 협상과 인내 끝에 일본 통산성 실무자들은 마음을 열었고 여수석유화학 공장 건설을 위한 용역 및 차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당시 일본 통산성 직원들 사이에는 매일 사무실 복도 의자에 앉아 마냥 기다리는 이상한 한국의 세 장성을 보고 '텐 스타(Ten Star)가 또왔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저런 공복들을 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복이 많은 지도자'라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만큼 백선엽과 그 당시 공직을 맡은 장성들은 자신의 체면이나 권위는 나라 위한 절박함과 사명감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편, 1973년에 시작된 제7비료공장 남해화학 건설은 암모니아 뿐만 아니라 요소, 질소비료까지도 생산하는 대규모 복합비료 공장으로 당시 미국 Agrico회사를 합작투자사로 차관을 지원을 받아 1977년에 완공하여 우리나라 비료공업의 한 획을 그었으며 꾸준히 증산함으로써 지금은 세계적인 비료공장으로 부상하였다. 그 밖에 종이를 만드는 펄프 생산과 버려지는 저압스팀을 활용한 소금 생산도 화학공업에 속한다고 해서 그 공장들도 지었다.
결과적으로, 10년의 재임 기간 중 백선엽은 우리나라에 14개의 화학공장을 건설하는 등 화학공업 분야의 산업근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지금 한국에서 가동 중인 대규모 석유화학 관련 공장이나 관련 제품 생산 회사들은 모두 이 시기에 소규모로 시작하여 훗날 민간에 매각되면서 크게 성공한 기업들이다. 대표적으로 롯데케미칼(舊호남석유화학), 대림화학, 애경그룹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