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장군

GENERAL PAIK SUN-YUP
백선엽 장군의 생애와 업적

한국 최초로 4성 장군 백선엽 장군의 생애와 업적

1946년 1월 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다. 이때는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으로, 육군이 아니라 남조선 국방경비대라고 불리었다.
국방경비대가 설립되자, 지체없이 국군에 입대하여 군번은 54번이었다.(그후 1948년 국군 창설 후 군번이 10054번으로 바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국군 중위로 임관하였다.

1946년 2월 (25세)

중위-제5중대 중대장
곧바로 중대장 임무를 부여받아 부산 감천리에 내려가 제 5중대를 창설하여 최초의 중대 규모의 국군병사 모병을 시작으로 군사 훈련을 시작하였다. (*중대급 병력은 약 60~255명)

1946년 9월 (25세)

소령-제5연대 1대대 대대장
중대가 점차 팽창함으로 소령으로 승진하여 제5연대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대대급 병력은 약 300~1,000명)

1947년 1월 1일 (26세)

중령-제5연대 연대장
5연대 창설모체 부대는 약 2년간에 걸쳐 점차 중대-대대-연대 규모까지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 시켜 국군 제5연대를 창설하였다. (*연대급 병력은 약 1,000~3,000명)

1948년 4월 11일 (27세)

통위부(현 국방부) 정보국장과 국방경비대 정보처장 겸직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국군이 창설되었다. 국방경비대는 육군으로 개칭하였다.

1948년 12월 25일 (27세)

대령 진급

1949년 1월 (28세)

대령. 정보국장
1948년 제주 4.3사건으로 시작된 군부 내 좌익세력은 그해 10월 여순 반란사건 후 군부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었다. 극심한 혼란을 겪은 정부는 이에 좌익 활동에 가담한 장병들을 일거에 척결하는 대규모 숙군작업을 지시했다.
당시 통위부(현 국방부) 정보국장으로 숙군을 전담한 백선엽 대령은 좌익 활동 가담자들을 철저하게 색출 처리하면서도 그들이 죄없이 억울한 처벌을 당하지 않도록 이응준 육군참모총장에게 건의하여 수감된 장병들을 직접 면담케 함으로써 훗날 이의가 없도록 만전을 기하였다. 백선엽 대령은 그 과정에서, 사형 확정된 12명 중 유일하게 박정희 소령(훗날 박정희 대통령)을 극적으로 구명하게 되었다. 숙군 작업의 지대한 성과는 그 이듬해 벌어진 6.25전쟁 중 국군부대가 적에게 집단 투항하는 사례가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증명되었다.

1949년 7월 30일 (28세)

광주 제5사단장으로 부임 (*사단급 병력:약 3,000~15,000명)

1950년 4월 22일 (29세)

제1사단장
제1사단장으로 부임한 직후 남침에 대비하여 임진강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950년 6월 25일 (29세)

북한 공산군의 전면적인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 발발
일요일 새벽 4시 30분, 북한 김일성 공산당의 북한군은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하였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2년도 채 안되어 나라가 매우 혼란하였고 전투장비도 매우 열악하여 그 당시 국군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6.25전쟁 발발 당시 백선엽 대령은 육본 교육파견명령으로 시흥 육군보병학교에서 교육 중이었다.

1950년 6월 25~28일

사단장-임진강 방어전투. 3일간 북한군의 기습 공세 저지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7사단이 맡았던 의정부 쪽이 무너지고, 서울은 3일만에 함락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 1사단을 맡았던 백선엽 대령은 3일 동안 임진강, 문산, 파주 일대에서 적에 대항하여 지역을 사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의 함락을 최대한 지연시켰다. 당시 국군 소총으로는 소련 전차(탱크)를 뚫지 못해 1사단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육탄 공격조를 만들어서 폭약과 수류탄을 몸에 지닌 채 적 전차에 뛰어들어 자폭하는 투혼으로 목숨 건 희생을 감행하며 최대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시겼다.
그러나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되고 유일한 한강다리 마저 파괴 되고 후방보급이 끊어져, 설상가상으로 더 이상 쏠 포탄이 남아있지 않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백선엽 사단장은 반격 계획을 중지하고 1사단을 해산하기로 결심하고, 흩어지는 1사단을 시흥보병학교에서 재편할 것을 명령했다. 그마저 어렵다면 마지막에는 지리산에 들어가서라도 최후까지 싸우자는 맹세를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사단장 일행은 한강을 건너기 위해 행주 나루터로 이동하였다. 6월 28일 저녁 무렵이었다. 백선엽 1사단장은 꼬박 나흘동안 물만 마시고 한끼의 식사도 하지 못했다. 또 군복이나 군화로 바꿀 시간도 없어 단화 뒤축이 떨어져 나가 튀어나온 못이 발을 파고들어 발뒷꿈치가 피투성이였으나 아픔을 몰랐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극도로 지친 사단장을 위해 나루터에 먼저 도착해 있던 참모들이 어디서 구해 왔는지 닭을 삶아 놓고 저녁을 드시라고 권했으나 사단장은 “내 병사들도 못 먹었는데..”하며 끝내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도 백선엽 대장은 그 날을 잊지 못하고 백숙을 끝내 못 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가 시흥보병학교에서 흩어진 1사단 병력들을 다시 수습하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29세)

낙동강 선까지 지연전
한강 도하 이 후 낙동강까지 약 한 달 간의 지연전 과정에서 1사단은 기적적으로 재편성, 장비도 보충하여 정상적인 부대로 보강하여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백선엽 1사단장은 상주에서 준장으로 승진하였고 뒤이어 낙동강 방어전투에서 1사단은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1950년 7월 25일 (29세)

준장 진급-1사단장

1950년 8월 (29세)

낙동강 최후 방어선 다부동 전투 승리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은 다부동에서 약 7,000여 명의 사단병력으로 아군보다 3배나 많은 2만 7천명의 북한군 3개 사단과 10배나 강한 화력으로 공격해오는 적을 맞아 6.25전쟁 중 가장 치열한 격전을 치뤘다. 최후의 조치로 백 사단장은 워커 美8군사령관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여 역사상 최초의 한미합동작전을 수행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백 사단장은 후퇴하는 장병들에게 "내가 앞장 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나를 쏴라!" 외치며 선두에서 반격하였다. 결국 다부동 전투는 6.25전쟁을 100일 안에 끝내려던 북한의 김일성 의도를 좌절시키고 전쟁의 흐름도 바꾸어 놓았다. 마침내 전세가 역전되어 1사단은 최초로 미군,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북진했고, 인천상륙작전 이 후 총 반격작전으로 북한군은 급격히 무너졌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

1950년 10월 (29세)

준장-1사단장-북진 작전
다부동에서 승리한 국군 1사단은 본격적인 북진과 평양공격을 기대하던 중, ‘1사단은 미군 사단의 후속지원 부대로 후방을 따라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사실을 접한 백선엽 장군은 밀번 美1군단장을 찾아가 “북한의 수도 평양공격에 국군이 직접 선두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납득 할 수 없다. 임진강 전투 이래 쓰라린 후퇴를 겪은 전우들과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수 많은 전우들의 명예를 되찾아 주기 위해서라도 국군이 참여해야 한다”고 간곡히 호소하였다.
1사단이 기동차량도 없는 것을 아는 밀번 장군은 미군 사단의 기동력과 비교하며 불가능하다고 하자, 백 사단장은 “우리는 차량은 많지 않으나 밤낮으로 행군할 투지가 있다. 한국은 산이 험하고 도로가 나빠 불철주야로 행군하면 오히려 국군이 걸어서 평양에 먼저 입성 할 수 있다. 게다가 평양은 내 고향이라 그 지리를 나만큼 아는 사람도 없다”며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거듭 주장하여 마침내, 밀번 장군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하여 국군 1사단이 평양 공격을 선봉에 서게 되는 극적인 반전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면서 국군 1사단은 美1기병사단과 평양을 목표로 서로 먼저 입성을 위한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었다.

1950년 10월 19일(29세)

준장-1사단장-평양 최초 입성
평양 진격 초기에 국군 1사단은 美1기병사단에 비해 수송 장비와 기동력이 너무나 부족하여 전진 속도가 지지부진하였다. 그러나, 1사단 장병들의 놀라운 단결과 사단 배속 부대였던 美10고사포단장(헤닉 대령)과 美6전차대대장(그로든 중령)의 헌신적인 협조와 지원으로 美1기병사단과의 치열한 평양 공격 선두 경쟁에서 결국 국군 1사단은 10월 19일, 美1기병사단보다 30분 먼저 평양의 대동강 다리를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백선엽 준장은 해방 후 자유 민주주의를 찾아 평양을 떠난 지 5년 만에 국군을 이끌고 꿈에 그리던 고향 평양을 다시 찾게 된 것이다.

1950년 10월31일 (29세)

준장-1사단장-운산 전투. 대규모 중공군 개입, 전 전선 철수
평양을 점령한 후, 거침없이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여 운산까지 전진하고 있을 때 백선엽 준장은 생포한 중공군 포로를 직접 심문하여 중공군 수십 만명이 이미 10월 중순에 압록강을 넘어와 아군의 작전 지역 깊숙이 매복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백선엽 1사단장은 즉시 밀번 美1군단장에게 보고하여 군단 전체 병력의 철수를 건의했다. 밀번 장군은 고심 끝에 美8군에 보고한 후 전 부대의 즉각적인 철수를 명령했다.
10월 31일 밤, 중공군의 본격적인 기습 포위가 시작되어 운산 전방에 나아갔던 국군 1사단의 예하 부대가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백선엽 장군은 헤닉 대령에게 美10고사포단의 화력을 집중 포격하여 밤새도록 1만 3천 발의 포탄을 중공군 진지에 퍼부어 각 예하 부대는 무사히 철수하였고 그 후 사단을 재정비시킬 수 있었다. 한편, 美8군의 주력인 美1군단은 중공군의 대규모 포위에서 벗어나 무사히 철수하게 됨으로써 차후 서부전선에서 작전 대비를 할 수 있었다.

1951년 4월 15일(30세)

소장 진급-제1군단장(*군단급 병력:약 20,000~80,000명)

1951년 5월 21일 (30세)

소장-제1군단장-대관령 전투
5월 16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6차공세로 국군 3군단이 보급로 요충지인 홍천 오마치(현재 오미재)고개를 어이없게 중공군에게 내 주자 밴 플리트 美8군 사령관은 국군의 전투지휘에 크게 실망하고, 대관령 우측에서는 동해안을 담당하고 있던 백선엽 장군의 국군 1군단이, 좌측에서는 美8군의 예비부대인 美3사단이 즉각적인 중공군 돌파구 차단작전에 임하라는 긴급 구두 명령을 하달하였다. 만약, 대관령 지역까지 중공군에게 뺏기면 동부와 서부전선의 균형이 무너지고 강릉까지 위험해진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백선엽 1군단장은 예하 사단에 지체없이 대관령을 신속히 방어하라는 출동 명령을 내려, 예하 부대가 가까스로 중공군보다 한 시간 먼저 대관령을 점령하게 되면서 중공군의 돌파구 확장을 성공적으로 저지시켰다.

1951년 7월 10일 (30세)

개성에서 휴전회담. 최초의 한국 대표(1군단장 겸직)
백선엽 소장은 전쟁 진행 중에 열린 휴전 협상에 최초의 유엔군 측 한국 대표로 나가게 되었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반도 통일을 바라보며 모두 휴전을 반대하였다. 백선엽 소장이 선정된 이유 중의 첫째는 공산측이 깔볼 수 없는 한국군의 장군이었고, 둘째는 중국어가 유창하여 적의 의도를 쉽게 파악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백 장군에게 협상에 참여는 하되 찬성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협상 중 아무 말도 하지말라고 지시했다. 백 장군은 협상에 참가한 3개월 동안 매일 친필로 협상 과정을 기록하였다. 휴전회담으로 인해 백선엽 장군이 1군단장 자리를 비운 사이 동부 전선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밴 플리트 美8군사령관은 백 장군을 다시 전선으로 복귀시킨다.

1951년 11월 16일 (30세)

소장-백(白)야사 사령관에 임명,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1952년 1월 12일 (31세)

중장으로 진급

1952년 1월 12일

중장-지리산 공비토벌작전 성공적 완료
1950년 10월부터 시작된 후방지역의 공비토벌작전이 14개월 동안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하자 이에 美8군 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은 백선엽 장군에게 “Task Force Paik(백 야전전투 사령부)”을 편성하여 지역 계엄사령관으로 군·관·민·경찰까지 동원하여 적 게릴라를 소탕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약 3개월간 집중적인 공비토벌작전(Operation Rat Killer)을 전개하였다. 작전중 백선엽장군은 다 같은 동포임을 고려하여 무자비한 살상이 나지 않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12월 2일 오전 6시를 기해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대전이남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사망자를 줄이기 위해 동경에서 만들어 온 1,000만장의 전단(귀향증 삐라)을 비행기로 뿌렸다. 백선엽 장군의 이름으로 뿌려진 전단의 내용은 ‘이 삐라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안전과 생명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동료이든 적이든, 북한사람이든 남한사람이든, 다 소중한 목숨, 한 나라 한 민족임을 강조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귀순자와 빨치산 주변 사람들을 위한 수용소까지 미리 마련하여 큰 성공으로 이끌었다. 또 백선엽 장군은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면서 발생한 200여명의 전쟁 고아들을 위해 광주 송정에 “백선육아원”을 설립하였다. 현재는 “백선바오로의 집"으로 개명하여 천주교 운영 시설이 되었다.

1952년 4월 5일 (31세)

중장-국군 최초의 근대적인 제2군단 재 창설
1952년 1월,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백선엽 장군에게 밴 플리트 美8군사령관은 '백야전사'를 모체로 하여 국군 2군단을 재 창설토록 제안하였다. 단순히 부대 병력 숫자만 늘린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기능 수행을 위해 美9군단의 참모진과 함께 2개월간 특별집중 OJT(On the Job Training)교육으로 미군의 최신 작전 수행 체계를 직접 전수 받도록 함으로서 완전히 새로운 전투사령부다운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1952년 4월, 강원도 화천 소토고미에서 美군단과 제병협동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국군 최초의 근대적인 제2군단을 창설하였다.
당시의 국군 군단은 보병만 있을 뿐 포병이나 기타 지원부대가 없는 허약한 편성이었으나, 재 창설된 국군 2군단은 미군의 군단과 같이 포병, 공병,통신 등 독자적인 전투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로 미군이 모든 장비를 지원하였고, 국군 최초로 군단부대관리규정 SOP (Standard Operating Procedure)를 만들어 매뉴얼에 의한 부대운용체계를 구축하였다.
백선엽 장군이 창설한 2군단을 모델로 국군은 휴전 후 백선엽 육군참모총장 재임기간 중 3, 5, 6군단이 속속 창설되었으며, 훗날 미군이 담당하던 155마일 휴전선을 순차적으로 인수 받아 서부전선의 美1군단과 함께 전 전선을 지키는 당당한 대한민국 국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52년 7월 23일 (31세)

중장-제7대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

1952년 12월 (32세)

육군참모총장-美대통령 당선자에게 국군 전력증강계획 브리핑
백선엽 중장은 수 많은 고지에서 중공군과 참호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국군 스스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전투력을 갖추게 하고자 박차를 가하였다. 10개 사단의 국군을 20개 사단으로 대폭 확장시키는 계획을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이 한국을 방문한 美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에게 직접 브리핑하여 설득함으로써 미 측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약 30만명이던 국군을 휴전 후 최대 약 60만명까지 증강된 10개 사단 창설을 완료하였다. 이에 따라, 6.25전쟁 중 10개 사단이던 국군은 휴전 당시 16개 사단이 되었고, 1954년 2월 백선엽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을 떠날 때는 20개 사단 60만 대군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제주도와 논산에 대규모 훈련장을 설치하여 제대로 훈련된 병사들을 양성하였고, 각 병과 장교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 최신의 군사교육을 습득케 하여 귀국 후에는 병과학교 교관으로 병사들을 교육시킴으로써 국군 스스로 양성하는 교육훈련 체계를 구축하였다.

1953년 1월 31일 (32세)

최초의 육군 대장
美8군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은 자신의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한국군의 병력이 이제 60만 대군을 넘어 한국군에도 대장급 장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승만 대통령께 건의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백선엽 중장을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 대장으로 승진시킨다.
진급식은 부산 경무대에서 있었으며, 별 4개가 달린 계급장 두 개를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다른 하나는 밴 플리트 美8군사령관이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의 양 어깨에 달아 주었다.

1953년 5월 (32세)

육군대학 총장 겸직

1953년 5월 13일 (32세)

대장-육군참모총장-아이젠하워 美대통령과 백악관 단독 면담
휴전 협정 중 1953년 5월 초, 美육군참모총장의 초청으로 백선엽 대장은 미국의 각종 군사시설과 교육기관을 둘러보고, 최고지휘관 특별교육과정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워싱턴D.C에 도착하여 6.25전쟁을 함께 치른 버크 美해군 제독을 만나 휴전 이 후 한국의 장래에 대해 토의를 하던 중, 미국에는 상호방위조약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 백선엽 장군은 콜린스 美육군참모총장을 찾아가 불문곡직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단독 면담을 요청한다. 예상치 못한 뜻밖의 요청에 콜린스 참모총장은 “미국 대통령은 그럴 시간이 없다”며 거절한다.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은 곤란하다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작년에도 美대통령께 중대한 브리핑을 했던 구면이고, 하루에도 수 많은 미군 전사자가 발생하는 전쟁터의 참모총장이기에 대통령을 직접 만날 자격이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아침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끈질긴 태도로 총장실 밖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전쟁 초기부터 백 장군과 안면이 있던 콜린스 美육군참모총장은 결국 백악관에 연락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단독 면담을 성사시켰다.
그 다음날 아침 1953년 5월 13일, 백악관에서 백선엽 대장은 통역사 없이 단독 면담 중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주저없이 남북통일을 염원하며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인들의 심정을 밝히고 또한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경제지원 방안’을 제안했다. 그 자리에서 美대통령은 이 사항에 대해 ‘원칙적으로는 동의한다’는 입장을 말하면서 긍정적인 전망을 밝혔다. 당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한 정부의 어떤 사전 지침도 없었으나, 백선엽 장군의 美대통령 단독면담에서 나온 그 논의는 5개월 후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라는 역사적인 결실을 맺는 디딤돌이 되었고 이 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발전과 안정을 위한 발판이 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1953년 7월 (32세)

대장-육군참모총장-전선 재정비 및 대규모 전후복구사업 전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마침내 3년 1개월 간의 6.25전쟁이 멈춘 상황에서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은 전후 국군 재정비와 함께 잿더미가 된 온 나라의 복구사업에 美8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 내어 국군과 나라의 재건에 혼신을 다하였다.
휴전선의 군사분계선 2km 후방에 철책선과 진지를 구축하는 대규모 작업이 미군과 함께 155마일 전 전선에 걸쳐 집중적으로 실시되었으며, 본토로 귀국하는 美8군으로부터 전차와 야포를 비롯해 각종 총기, 탄약, 축성 및 공병자재 등 엄청난 군수물자들을 한국군이 인수 받아 전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또한, 백선엽 장군은 테일러 美8군사령관과 친밀한 협조 하에 한국군과 美8군 장병이 대대적으로 동원되어 전후방 동시에 전국적인 전후복구사업(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을 펼치게 함으로서 파괴된 병원,학교,교량,교회 등 수 많은 공공시설을 재건하였으며, 그 때 재건된 학교가 약 900개, 병원과 고아원이 각각 200여개, 교회는 약 300개에 달하였다.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1954년 2월 14일 (33세)

대장-제1야전군 창설(*야전군 규모 : 약 80,000~200,000명)
1953년 말, 휴전 후 국군이 재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무렵, 테일러 美8군사령관은 155마일 전선 대부분을 한국군이 담당하게 된 상황에서 美8군은 전방의 육군사단 전체를 지휘하는 별도의 야전군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백선엽 장군을 군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야전군 창설을 맡기려고 하였다.
지휘 구조상으로 군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지만, 백선엽장군은 군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직위가 내려 가더라도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자세로 제1야전군 창설을 맡기로 하였다. 그 당시로는 아시아에서 한국군이 최대규모의 야전군을 창설한다는 의미도 컸다. 백선엽 장군은 참모총장을 마무리하면서 다음 과제인 제1야전군 창설 준비에 집중하였다. 창설 2개월 전에 창설요원들을 미리 美10군단에 파견하여 사전 준비작업에 임하게 하였고, 육본 예하의 각 병과 학교장들을 제1야전군 사령부의 참모요원으로 내정하여 역시 미군 각 병과 참모부로부터 사전 교육을 받게함으로써 안정된 창설부대 정착이 되도록 치밀하게 준비시켰다.
제1야전군 창설식은 1953년 12월 15일, 강원도 인제 관대리에서 거행됨에 따라 1야전군은 휘하에 4개 군단, 16개 사단을 거느린 거대 야전군으로 국군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백선엽 장군은 초대 1군사령관으로 40개월 간 지휘하면서 창설된 1군을 올바른 기초 위에 세우고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재임기간 중 주말 휴일에 단 한 번도 서울 지역에 출타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美 군사교육 전문가였던 클라크 美10군단장과 에이브럼즈 참모장을 비롯한 유능한 미군 참모들로부터 1:1 전수교육을 받게 하였으며, 美8군을 통해 美 버지니아 Ft. Monroe(교육총본부)에 있는 각종 교범과 훈련 자료들을 입수하여 그들의 knowhow를 전수토록 하였다. 1군 자체적으로는 대부대의 실전적 훈련을 위해 끊임없이 예하부대를 독려하여 1955년 가을에는 양평.횡성 일대에서 최초로 사단 대항훈련을 실시했고, 국군 최초로 지휘관과 참모가 지휘소에 모여 도상으로 훈련하는 지휘소연습(CPX : Command Post Exercise)을 시행하여 이 후 매년 정기적으로 훈련하도록 정착시켰다.
(*c.f : 美10군단 참모장이었던 크레이튼 에이브럼즈 대령은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월남전 당시 미군사령관으로 파월장병 격려차 월남을 방문한 백선엽 캐나다 대사와 재회한 바 있으며, 훗날 美육군참모총장까지 올라 새로운 전차개발을 주도하였고, 유명한 M1 ‘에이브럼즈’ 美전차 이름이 그를 기념하여 명명한 것이다. 그의 아들 로버트 에이브럼즈 대장은 2018~2021년 연합사령관을 역임하였고, 그는 부임 직후 백선엽 장군을 예방하여 깊은 경의를 표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백선엽 장군께 직접 증정하였다.)

1954년 2월 14일 (33세)

대장-동작동 국군묘지 준공
백선엽 대장은 6.25전쟁 희생 장병들을 위해 국군 묘지 조성을 계획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3년에 걸쳐 동작동 일대의 묘지를 조성하여 1957년에 동작동 국군묘지를 준공하였다. 그 후 2006년에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57년 5월 18일 (36세)

대장-제10대 육군참모총장에 재임명

1958년 3월 (37세)

대장-육군참모총장-미 국방성 방문, 한국 육.해.공군 현대화 협상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은 당시 70만명이 넘는 국군의 군 장비 현대화를 위한 협상 타결을 위해 참모들을 대동하고 직접 미국을 방문 하였다. 미 펜타곤에서 관계자들에게 한국군 현대화 계획안을 자세히 브리핑하고 다시 재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만나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지원을 받아 내었다.

1959년 2월 23일 (38세)

대장-연합참모본부 의장-한국 육군에 ROTC제도 도입
백선엽 장군은 육군 장교 양성을 위해 한국 육군에 美ROTC제도를 도입하고자 연구, 검토를 거쳐 재임기간 중 육군에 최초로 ROTC제도 도입 방침을 확정시켰다. 이 후 백 장군이 군문을 떠난 2년 뒤인 1962년 6월에 육군 ROTC 제1기생이 배출되었다.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1960년 5월 31일 (39세)

육군 대장-전역, 14년 5개월의 군생활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