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로 4성 장군 백선엽 장군의 생애와 업적
백선엽 장군은 전역한 이후 국가의 명령에 따라 크게 두 분야에서 공직자로 일하였다.
하나는 외교관으로서 약 10년간에 걸쳐 대만, 프랑스 등 17개국을 겸임,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국내 교통부 장관과 화학공업 총괄사장으로서 약 10년간 국가 산업발전에 열정적으로 봉사하였다.
대만에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임명을 받은 백선엽 대사는 대부분의 교민들이 어렵게 살아간다는 것을 파악하고 한국 교민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한국학교를 설립했다.
6.25전쟁을 치른 대한민국이 전후 복구와 나라의 재건에 힘을 쏟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세계 외교를 펼치기 열악한 환경에서 대사 임무 수행은 어려웠다. 특히 1961년 5월 한국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 혁명으로 새로운 정부가 시작되면서 새 정부의 정당성을 세계 각국에 이해시키고 적극적인 수교 관계를 맺도록 하는 임무가 주어짐으로 여유 있는 대사 근무가 아니라, 새롭게 외교를 개척해 나가야 하는 외교전쟁의 일선에서 근무하였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생존을 위해 고군 분투하던 1960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79달러였다. 그만큼 나라의 경제력이나 국력은 빈약했다. 그런 이유로 1961년 7월,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은 대만 대사에서 프랑스 대사로 부임하여 4년 3개월간 근무하면서 프랑스 이외에 서유럽의 5개국〔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과 아프리카 13개국〔세네갈, 모리타니, 아이보리코스트 (현 코트디부아르), 토고, 다호메이 (현 베냉), 니제르, 차드, 가봉,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브라자빌 콩고, 킨샤사 콩고, 마다가스카르, 오트볼타(현 부르키나파소)〕등 총 18개국 대사를 겸임하는 특이한 외교관 역할을 수행해야했다.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한 전 세계 UN참전국을 포함한 유럽, 아프리카의 정상 및 주요 인사들은 외교관 백선엽 대사 보다 한국전쟁을 이끌었던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대장으로 익히 알고 있었고, 백선엽 장군도 그 점을 늘 인식하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외교력 확장을 위해 쉼 없이 일하였다.
백선엽 대사는 1964년 네덜란드에서 애국지사 이준 열사의 유골을 한국으로 환국하였고 북한의 프랑스 진출 공세를 막아내는 임무를 철저히 했다.
초대 주 캐나다 대사로 부임한 캐나다와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 · 개척하였고, 한국전쟁 참전국인 캐나다와 적극 우호관계를 맺음으로 수교국으로서 든든한 기초를 세웠다. 그 당시 캐나다와 미국을 왕복하는 교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돕고자 대사가 직접 나서서 까다로운 비자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또 독일에서 일하던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은 캐나다로 이민 오고 싶어 했지만, 이러한 요구는 그 당시 한국 정부 정책에 위배되어 주 캐나다 한국 대사관에서는 여권을 연장할 수가 없었다. 영사들의 권한으로는 여권 연장이 불가능해지자, 교민들의 고통을 안 백선엽 대사는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질테니, 원하는 모든 교민들에게 여권 연장을 해주라”고 지시하며 교민들의 애환을 보살펴 주었다.